교회 안에도 싫어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어하고 좋아하는 일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저를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혹스럽습니다.
목사를 싫어하면서도 교회에 나오니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지만 그래도 한편으로 얼마나 힘들까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최영기 목사님이 가정교회를 정착 시키고자 애쓰는 젊은 담임목사를 돕기 위해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신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은퇴하신 원로 목사님이 막후에서 사람들을 조정하여 가정교회를 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최목사님의 글을 그대로 소개해 드립니다.
"부흥집회가 끝나는 주일날 원로 목사님이 예배에 참석하여 맨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설교 후 헌신 초청을 했을 때 교인들 대다수가 일어나서 헌신을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원로 목사님도 이런 결과를 보시면서 나에게 호감을 갖게 되고,
가정 교회에 관해 긍정적으로 의견이 바뀌겠다고 기대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출구에 서서 퇴장하는 교인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는데,
원로 목사님이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의외의 말을 하셨습니다.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라든지 최소한 “수고 했습니다”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이분의 말은 저를 당혹시켰습니다.
“최 목사님은 왜 강단에서 거짓말을 하십니까?”
제가 설교 중에 젊은 담임 목사님과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했는데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무척 당황했습니다. 이때에, 아무리 은혜로운 설교를 해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마 후 제가 피해자 입장에서 가해자 입장으로 바뀌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말씀을 전하는 집회에 참석하였는데, 저는 부끄럽지만 이 선교사에게
“싫다”는 감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고 헌신 초청에 많은 사람들이 응했습니다. 그런데도 내 마음은 냉랭한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저를 당황시켰던 원로 목사님과 제가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싫다”는 감정은 조절이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저를 향한 원로 목사님의 감정이 “싫다”는 것이었고, 선교사를 향한 제 감정이 “싫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말씀을 전하고, 아무리 고귀한 사역을 해도, 감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저를 좋아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하고, 좀 더 잘하면, 좋아해주지 않을까 는 기대를 내려놓기로 하였습니다.
반면에, 나 자신이 “싫다”는 감정에 노예가 되지 아니하도록 노력합니다.
“싫다”는 감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데, 하나님께서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싫은 사람이 좋아지게 하시든지,
아니면 적어도 같은 목표를 놓고 상호 존중해가며 동역은 할 수 있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