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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는 선택이다(눅17:11-19)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래서 보고 싶은 것, 보려고 하는 것을 보다가 정작 보이는 것을 다 보지 못 한다. 내가 좋은 것을 보려고 하면 좋은 것만 보이는데, 나쁜 것을 보려고 하면 나쁜 것만 보인다. 문제는 우리 인생이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나쁜 일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일 나쁜 일이 섞여 있는데 좋은 일을 더 많이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을 더 많이 보는 사람도 있다.
무엇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좋은 것을 보고 감사할 수도 있고 나쁜 것을 보고 불평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감사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좋은 면을 보겠노라고 다짐하고 감사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은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감사를 선택하라는 뜻이다. 이런 견해에 찬성하지 않은 사람은 감사가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자연히 일어나는 반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조건을 갖추면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나병환자 열 명은 모두 고침을 받았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서 감사했다. 열 명은 모두 감사의 조건을 갖추었다. 당시 나병에 걸리면 회복 불능이고 인생이 끝장난 것과 같다. 그런 질병에서 치료되었으니 이것보다 더한 감사 거리가 없다. 그런데도 아홉 명은 감사하지 않았고 한 명만 돌아와서 감사했다. 감사의 조건만 충족되면 자동적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홉 명이 돌아와서 감사하지 않은 것은 빨리 사회로 복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감사의 조건을 충분히 누리기 이전에 먼저 감사를 표현하기를 원하신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하고 찾으신다.
감사의 조건이 생겼을 때 감사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는 내 선택에 달린 것이다. 한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와서 예수님에게 적극적으로 감사를 표현했다. 질문해보자. 빨리 가서 한시라도 행복을 누리고 싶어했던 아홉 명과 가던 길을 돌이켜 감사를 표현한 한 명 가운데 누가 더 행복했을까? 고침 받은 열 명이 다 행복했겠지만 감사한 사람이 더 행복했을 것이다. 감사한 만큼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해서 감사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하니까 행복하다. 예수 믿어도 행복하지 못하는 것은 감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감사한 사람에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이 감사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믿습니다’ 라는 말보다 ‘감사합니다’가 한 수준 높은 말이다. 주님의 능력과 주권을 믿기에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이나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고 믿어야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우리의 행복은 그분의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다. 주님이 계신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 시편 107편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의 이유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 감사의 근거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이다. 세상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어떤 것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주님은 우리가 언제나 밝은 면을 보면서 감사하여 행복하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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