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인도에서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고 있습니다. 자전거를 다루는 게 영 불안 불안한 것이 한눈에 보아도 초보 운전임에 틀림없습니다. 지나가던 어른이 한마디 하셨습니다. 아마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다 그분 옷깃이라도 스쳤던 것 같습니다. “야 이눔아, 그 실력으로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면 되겠냐?” 그러자 아이가 받아친 말도 일리가 없진 않습니다. “그러면 아저씨, 이 실력으로 차도에서 타란 말이에요?”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면 이런 대화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티븐코비가 쓴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 둘을 데리고 전철을 탔습니다. 마침 그때는 손님들이 별로 없었고 한가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 아들 둘이 이리저리 통로를 뛰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다른 승객의 발을 밟고 신을 신고 의자에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몇몇 손님들의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런데 더 화가 나는 것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두었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던 한 손님이 참다 참다가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 여보시오, 아무리 그래도 아이들이 이렇게 시끄럽게 굴고 소란을 피우는데 왜 아버지가 가만히 있습니까? 뭐라고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러자 이 아버지 되시는 분이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사실 조금 전에 아이들 엄마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죽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저렇게 떠들었나 봅니다. 저도 이 아이들 데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지 몰라서 딴생각을 하다가 아이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서 옆 사람이, “아 그래요? 괜찮아요” 하고 받아주었습니다. 그런 다음에도 아이들이 전처럼 계속 떠들고 돌아다니는데 사람들이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지만 반응은 처음과 달랐습니다. 입장을 조금만 바꾸어서 보면 상황이 전혀 다르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입장에서 자기 생각만 하고 살다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생각을 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생각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이웃까지 생각하게 된 사람입니다. 십자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죽는 곳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내 입장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사순절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 입장을 내려놓고 남의 입장으로 두루 살펴보니 세상이 온통 별천지로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