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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달린 강도 이야기(눅23:39-43)
십자가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 사형수들 이야기다. 이 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누구도 자기 인생이 사형수로 끝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들도 잘살고 싶었을 것이고 행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원하지 않는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 불행한 십자가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이다. 똑같은 모습, 똑같은 고통으로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자리에 오셨다고 해서 금방 무슨 변화가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 한 명은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가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똑같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똑같은 은혜가 임하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은 그 길로 끝이었지만 한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 이들을 다르게 만든 것일까?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비방했던 사람은 그 안에 분노가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마땅히 인간에게 도움을 주어야지 세상을 이 모양으로 만들어서, 나 같은 사람은 강도짓이나 해야만 먹고 사는 이런 험악한 세상을 만들어 놓았는가? 네가 정말 구원자라면 나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어야지 왜 바보같이 이러고만 있느냐?’ 세상에 대한 피해의식이 있고,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내가 옳고, 내가 객관적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대표한다. 의식적으로 마음의 문을 닫으면 그 사람은 끝내 자신의 경험 세계에만 살게 된다.
그런데 또 한 사형수는 예수님을 비방하는 그 사람을 꾸짖는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41절) 자기는 잘못 했지만, 예수님은 옳다고 한다. 자기는 죄가 있고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한다. 이게 몸이 찢겨지는 처절한 십자가 위에서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는 이 고통 속에서도 고통을 능가하는 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은 십자가 위에서 자기를 못박는 자를 용서하시는 사랑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가 살아온 경험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분이 그 나라의 왕이구나 하는 것을 순식간에 깨닫게 된 것이다. 은혜가 임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하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낙원을 선물로 허락해주셨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다는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질 때 사랑 앞에서 마음을 여는 것이 믿음이다. 브래넌매닝이라는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천국에 가면 입구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때 주님은 딱 한 가지 질문을 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했을 때 너는 정말 그 말을 믿었는가?’ 행악자가 들은 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을 여러분도 듣고 싶은가? 마음을 열고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나는 죄인이고 주님은 하나님입니다. 나는 잘못되었고 주님은 옳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진실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라. 오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낙원의 문을 열어주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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