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엄마의 손을 잡고 마트에 나와서 두리번거리는 작은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다.
마트에 처음 나와본 듯이 아이는 고개를 연신 두리번거리면서 엄마에게 ‘이게 뭐지?’를 연발했다.
장난감 가게에서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것저것 만져보기도 했고, 신기한 장난감이라고 생각했는지 구경하느라 움직이지 않자 엄마가 애써 손을 잡아당기기도 하였다.
생선가게 앞에서 이 아이를 다시 만났다.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서 서둘러 지나가려고 했지만 아이는 네모난 통안에 시선이 닿아 있다.
통 속에는 미꾸라지들이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이의 눈망울이 커지더니 꿈틀거리는 미꾸라지들에게 손을 흔들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안뇽!”이라고 인사했다.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짧은 순간이지만 뭔가 가슴에 뭉클하는 것이 있었다.
미꾸라지에게 ‘안뇽’하며 인사를 건네는 이런 감수성의 정체는 무엇일까?
알고 보니 미꾸라지에게만 인사를 건네는 것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다른 수족관에 엉켜있는 꽃게에게도 “안뇽!”하며 인사했다.
이 아이가 특별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 또래 아이라면 누구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추어탕이나 꽃게탕의 재료감으로 보였을 미꾸라지나 꽃게를 그 아이는 인격체로 느끼고 말을 건네는 것이다.
지적능력은 머리가 발달한 어른들이 더 뛰어날지 몰라도 오감 능력은 아이들이 훨씬 더 뛰어난 것 같다.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머리가 성장하면 오감 능력이 퇴화하는 것 같다.
머리를 사용하면 할수록 오감은 쓸모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시각은 기껏해야 글이나 보고 모니터나 볼 뿐이다.
하늘이나 구름, 나무나 숲을 보지는 못한다.
청각으로는 정보를 듣지 새소리나 바람 소리를 듣지 못한다.
촉각으로는 컴퓨터 자판기를 느낄 뿐이지 꽃을 쓰다듬거나 새순을 만져보지 못한다.
정보는 불어나고 지식은 쌓이겠지만 오감 능력은 빈약하고 왜소해진다.
우리가 많이 배워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이 퇴화하니까 행복을 덜 누리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행복도 머리의 일로 생각해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뛰어나야 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해지기 위해 머리를 한껏 키우지만, 결국 미꾸라지를 보면서 탄성을 지르는 아기의 행복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오감 능력을 어떻게 하면 회복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주기적으로 머리를 쉬게 하면 된다.
그러면 주기적으로 머리를 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날 교회가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