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 싶은 좋은 글이 있어 인용해볼까 합니다. 박대영 목사가 쓴 <묵상의 여정>에 있는 글입니다.
로드니 클레이븐은 <사람을 위한 영성>에서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라고 했다.
그것을 근육의 기억이라고 부른다.
한 영어 강사가 외국어는 체육과목이라고 한 말에 깊이 공감한다.
영어 단어 하나를 발음하기 위해서 400개의 근육이 사용된다.
머리로만 단어를 배우면 실제 상황에서는 좀처럼 사용할 수 없지만 반복하여 말하면 400개에 근육이 단어를 기억해 낸다고 한다.
소문난 식당은 음식에 들어가야 재료의 양을 정확히 재는 성능 좋은 저울이 있는 집이 아니라 타고난 손맛(몸이 기억하는 느낌)을 가진 주방장이 있는 집이다.
피아니스트도 마찬가지다.
머리뿐 아니라 몸이 악보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신앙도 몸으로 한다.
우리는 몸으로, 몸을 통해 배운다.
머리로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만큼이 내 신앙일지도 모른다.
내 의지가 신앙을 배반하고, 내 감정이 나를 속일 때 깊은 아픔과 우울과 절망의 골짜기를 지날 때, 나를 다시 일으켜 주는 것은 의지와 감정이 아니라 몸의 기억일 때가 많다.
반복적인 몸의 활동이 내 의식을 변화시키고 내 감정을 회복시키고 내 의지를 다시 불러일으켜 준다… 신앙생활은 몸의 훈련이다.
무슨 운동이든 코치가 처음 가르쳐 준 기본자세는 늘 어색하고 불편하다.
효과가 금세 나타나지도 않아 재미도 없다.
기존의 내 습관을 따르지 않기 위해 동작 하나하나마다 의식해야 하기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근육의 기억력 차이다.
너무 힘들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몸의 아우성에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내 눈의 근육은 항상 새벽 4:25에 감은 눈을 뜨게 한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아무리 몸이 피곤하고, 마음이 아프고 영적으로 침체되었을 때라도, 내 몸은 나를 새벽에 깨운다.
내 몸의 습관이 내 감정과 의지를 압도했다.
내 몸은 연약하다. 그러나 정직하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한다.
또 특별한 지시가 없으면 늘 기억하는 대로 움직여 준다.
몸이 스스로 기억하여 나를 주님과 교제하는 삶으로 인도하여야 한다.
내가 알고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내 몸의 수준 즉 내 몸의 기억하는 신앙 수준이 진짜 내 신앙이라는 진실을 정직하게 인정했을 때 나는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영적인 일은 결코 저절로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