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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는 결단(행2:42-47)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고쳐 읽는다. 기적 이야기도 그렇고 오늘 본문 이야기도 그렇다. 초대교회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42절, 46절 말씀에 보면,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성전에서도 모이고 집에서 떡을 떼며 음식도 나누어 먹었다. 오늘날 교회 모습과 어느 정도 닮았다. 그러면 44절, 45절은 어떤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을 팔아서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이 부분은 지금 우리와 너무 다르다. 우리 문화 방식과 다른 이런 모습을 전해주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고 싶은 것일까?
이 구절은 행2:16,17을 통해서 해석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말세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겠다고 한 것이 오늘 눈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말세가 시작된 것이다. 아직은 여전히 로마의 폭정 아래에 살고 있지만, 성령이 오셔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신들이 옛 시대와 새 시대가 맞물려 있는 새 시대의 문지방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새 시대의 문턱에 서 있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삶의 방식은 우리가 가진 만큼 누릴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더 많이 가지면 더 많이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본문이 읽히지 않는다. 내 형제가 가난하여 배가 고프니 내가 가지고 있는 땅을 팔아서 나누어주자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때 역사의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달랐다. 자기 것을 내어놓고 함께 나누었다. 분명히 불편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들은 자기 안락함을 위해서 돈을 사용하지 않고 내어주는 삶을 살았을까? 그 시대에도 돈은 필요했다. 말세가 되면 이런 사람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딤후3:2) 초대교회 주변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안락한 삶을 목적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 시대 문화의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스리는 행동을 하고 있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달리 자기를 버리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과 달리 이웃을 위해서 돈을 사용하는 삶을 살았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그들이 믿는바 대로 살았던 것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고 그렇다면 신자는 옛시대와 타협하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질서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싸움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보여주는 유일한 창문이었다. 이것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했다. 신앙의 싸움은 다른 것이 아니다. 대다수 사람은 안락함을 위해서 종교를 갖는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안락함에 저항하고 하나님이 가져올 새로운 질서에 합당하게 살도록 도전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결단을 요구한다. 새로운 세상이 오는데 너는 그것에 따라 살 것인가? 아니면 세상 사람들 따라 그냥 살 것인가?
우리의 삶의 방식은 어떤가? 새로운 질서를 따르고 있는가? 아니면 옛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우리가 교회라면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을 나를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면 안된다. 우리는 땅의 것을 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위의 것을 구하는 자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초대교회의 힘이 여기서 나온 것이다. 새로운 사회, 새로운 질서가 세상에 충격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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