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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141207)
죽음이 두렵지 않는 사람(빌1:21-30)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죽음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살아온 세상의 끝이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셋째,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해야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인간을 지배하여 바른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죽음 때문에 중요한 일이 하찮게 여겨지기도 하고, 죽음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움직여서 굴복시키기 위해서 죽음의 공포를 조장하여 위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몸만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죽일 수 있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하였다.
본문에서 바울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고백을 한다.
삶보다 죽음이 훨씬 더 좋다는 것이다.
죽어서 자신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실체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바울의 인식이 달라졌던 것은 스데반이 순교할 때인 것으로 보인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평안한 얼굴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라고 기도하며 순교했다.
그 당시 청년 바울은 예수를 알지 못했고 예수 믿는 자를 박해할 때였다.
무엇이 죽음을 두렵지 않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죽음조차도 저렇게 평화스럽게 만들었을까?
청년 바울의 뇌리 속에는 죽어가던 스데반의 평안한 얼굴이 깊이 박혀 있었다.
그 이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되었고 그 일로 인하여 그의 삶은 혁명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스데반의 죽음에서 본 평강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도 죽음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한번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신의 영혼이 셋째 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다.
아마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함께 잠시 머물렀던 것 같다.
그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 세상에 미련이 있겠는가?
그러니 그에게 죽음은 축복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18세기 스웨덴보리라는 사람은 뇌에 대한 연구를 하던 사람인데
23살 때 영계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오직 하나님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하였다.
그의 연구도 참고해 보면 재미있다.
그는 하늘이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죽은 영혼들은 자기들이 편하게 생각되는 층으로 선택한다고 한다.
악인은 선인이 있는 곳이 불편하다고 생각한다. 선인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죽은 영혼은 자기가 편하게 생각하는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데
결과적으로 악인은 악인이 있는 곳으로 선인은 선인이 있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빛이 세상에 왔을 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이 어둠에 숨어 있는 것 자체가 심판이고 정죄라고 하였다.
여러분들은 누구와 함께 있는 것이 편한가?
바울은 본문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21절)라고 하였고,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알았다.
그 영광을 생각할 때 삶에는 미련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서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정말 예수를 알고 복음을 아는 자의 능력이다.
한 마음으로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다.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에 합당한 그런 삶을 살라고 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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