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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발꿈치를 잡다(창25:19-26)
야곱은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인물로 선정되었다. 바울과 모세, 다윗을 제치고 야곱이 선택된 것은 야곱이 우리와 가장 닮은 성정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야곱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집요하게 씨름하는 모습이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은 존경받을만한 모습이다. 그런데 복을 얻는 과정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또 남이야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식이라면 공동체 의식도 상실될 수 있다. 이런 폐해가 야곱에게도 그대로 드러난다.
야곱은 태어날 때 쌍둥이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형을 잡아놓고 자신이 먼저 나가서 장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이 야곱이 되었는데 이 이름 속에 야곱의 인생이 축약되어 있다.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즉 작은 자로서 큰 자의 섬김을 받게 해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였는데 야곱은 스스로 큰 자가 되기 위해서 분투했던 것이다. 그래서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특권을 사는 것도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남이 받아야 할 축복도 대신 받을 수 있다면 앞이 안 보이는 불쌍한 아버지 정도야 얼마든지 속여도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 모습도 야곱을 많이 닮아있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야곱이 되라고 부추긴다. 좋든 싫든 남과 경쟁해서 남의 것을 빼앗아야 내가 더 많이 갖게 되고, 속여야 이기고, 들키면 도망가고, 소중하다 싶으면 붙들고, 빼앗기기 싫으면 움켜쥐고...우리도 매일 그렇게 살아간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을 처세술처럼 여기고 성공하는 방법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을 축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교인들도 남이 어떻게 되든지 내가 잘되고 내 자녀가 잘 되면 축복이라고 간증하다. 사고 난 차에서 홀로 살아난 것을 축복이라고 간증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짐이고 부담이다.
우리도 남의 발꿈치를 잡고 살아가는 야곱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무엇인가 쟁취한 것이 있겠지만 야곱처럼 ‘험악한 세월’을 살아왔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고, 살면서도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는 못했다. 야곱이 그렇게 애써서 쟁취하려고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도 주실 수 있는 것인데, 야곱은 그것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얻어내려 한 것이다. 야곱이 험악한 인생을 살면서도 나중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사람의 발꿈치를 붙잡지 않고 하나님을 붙잡았던 것이다.
야곱은 오랜 세월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가에서 누군가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는 평생 남의 발꿈치를 잡는데 선수였기에 그 사람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다. 천사가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야곱이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과 달리 이번에는 세상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았다. 세상을 붙잡아서 얻었던 결실을 다 포기하고 외롭게 빈손으로 하나님을 붙잡았던 것이다. 그순간 그가 평생 풀지 못했던 문제가 풀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힘은 세상을 잡으려 하지 않고 놓을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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