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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마5:38-48)
‘잃어버린 기술 용서’라는 책에서 용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소개하고 있다. 첫째, 용서는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죄를 묵과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잡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둘째, 용서는 화해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하더라도 관계가 회복된다는 보장은 없다. 용서는 혼자서 할 수 있지만 화해는 두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화해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용서는 단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일회성이 아니라 과정이다. 용서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이런 전제를 가지고 본문을 살펴보자.
38절, 율법에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신다. 대적하지 말라는 것은 악한 자를 그냥 봐줘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대적’은 군사적 용어다. 무장하여 악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는 것이다. 악한 자가폭력을 휘두르고 불의한 방법으로 공격을 하더라도 똑같은 방식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는 어떤 명분으로도 악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다른 방식의 대응에 대해서 예수님은 44절에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사랑하라는 것이 곧 화해하라는 것은 아니다. 원수와 화해하려면 원수가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해야 한다. 그러나 원수가 여전히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아도 내가 사랑하고 기도할 수는 있다. 대개 사람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같은 방식으로 보복하려고 한다. 반대로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나도 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려고 한다. 본능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자라면 이런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과 달라야 한다고 한다. 신자는 사랑하고 기도해야 한다. 46절,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47절,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하나님 자녀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과 뜻 가운데서 순종하는 삶으로 반응해야 한다.
예수님 당시 청중들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늘 맞아야 하고 빼앗겨야 하는 사람들이고 원치 않은 일을 강제로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 감정에 묶인 노예처럼 반응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삶으로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른뺨을 맞을 때는 노예이지만 왼뺨을 돌려댈 때 그는 진리 안에서 자유인이다. 속옷을 빼앗길 때는 노예이지만 겉옷을 줄 때는 자유인이다. 원수를 미워할 때는 독한 감정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할 때는 그의 정신은 태산 같아서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된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보잘것없이 늘 눌려 사는 의기소침한 자들에게 약속을 주신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명령이 아니라 약속이다.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온전한 자가 되게 해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불가능할 것 같은 약속이지만 이 약속을 믿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면 마침내 선으로 악을 이기는 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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