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개 자기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보이는 모습대로 삶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꼭 진실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것이 전부일 수도 없습니다. 인생은 너무나 다채로운 모습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관점과 아울러 다른 사람의 관점까지도 함께 보아야 삶의 전체 면모를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관점을 가지고 아내는 남편의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의 관점을 가지고 성도는 목회자의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 베푸는 호의라고 하지만, 내 방식대로 베푸는 호의가 항상 사랑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의 눈에 비친 삶을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베푸는 호의가 그에게는 아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얼마 전 배구 스타 박철우는 예전에 이상렬 감독에게 폭행당한 사실을 고백하며, 가끔 시합장에서 이감독을 만나면 악수하자고 손을 내미는데 그때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상대가 느끼는 감정을 잘 배려한 행동이 좋은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이웃의 입장이라면 지금 이 현실이 어떻게 보일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것이 사랑의 출발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7:12)고 하였습니다. 남의 눈으로 비취는 삶을 먼저 보라는 뜻입니다.
살면서 중요한 것이 ‘역지사지’(처지를 바꾸어 생각함)임을 자주 깨닫습니다. 그런데 가장 잘 잊어버리는 것도 이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매우 다양하지만, 해법은 ‘역지사지’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야 하되, 특별히 약자의 관점에서 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행동으로 인해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이가 약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심판 때 약자에게 한 것을 예수님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 땅에서 약자의 관점에서 보이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고 이해하려고 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관점은 삶을 보는 창문입니다. 자기 관점이란 창문으로만 보면 인생의 한 면만 보일 뿐입니다. 나와 다른 이의 관점으로도 볼 수 있어야 인생의 전체 모습을 조금이나마 아우를 수 있습니다. 요즘은 빈부격차가 심한 것 같습니다. 내 입장에서만 보면 세상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순과 불의가 무엇인지 잘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모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무엇이 참 사랑의 깊이인지를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