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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로야 나오라(요11:17-44)
나사로 사건은 요한복음에서 마지막 표적이다. 표적을 잘못 이해하면 시험에 들 수 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데 왜 내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 척하시고, 내 고통은 그대로 두시는가? 표적을 잘못 이해하면 소외감이 들고, 성경에서 예수님 만나서 치료받았다는 이야기는 나랑 아무 관계가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표적은 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 일상에 하나님 나라의 힘이 들어온 사건이다. 그래서 표적은 사건 하나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통해 이 현실 속에 영원한 힘이 실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고통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부족했거나 충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에서 치유 받은 사람 가운데 충성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표적이 가지는 여러 가지 오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표적을 보이시는 것은 그 사건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실재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지 그 사건 하나를 해결하는 것에 주된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나사로 집에 도착했을 때 마르다는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하였다. 마르다는 여전히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못했다. 다수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죽음이 일어나면 모든 희망을 다 접어야 한다. 죽음은 절대적 권세자다. 예수님은 마르다와 이야기를 마치고 마리아를 부르셨다. 마리아도 예수님이 여기에 계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좀더 일찍 오셨으면 희망이라도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이 말을 하고 마리아는 서서 울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33절)라고 했다. ‘비통’은 ‘분노’라는 뜻이다. 그럼 누구에게 분노한 것일까? 이들을 이토록 슬픔에 빠뜨린 죽음 자체에 대한 분노이다. 그리고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셨다.
무덤 앞에 다가갔을 때 예수님도 우셨다.(35절) 예수님이 눈물 흘리는 것을 본 어떤 유대인은 맹인의 눈을 떠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던 것이냐고 반문했다. 예수님은 이 말을 듣고서 다시 비통히 여기셨다. 죽음은 누구라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죽음의 권세에 대해서 분노한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분노하고 죽음에 대해 호령할 수 있는 존재는 역사 속에서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다. 무덤 앞에선 예수님은 큰소리로 외치기를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불렀다. 잠시 긴장된 시간이 흐른뒤 무덤 입구에 수족을 베로 동인 나사로가 걸어 나왔다.
이것을 통해서 죽음이 인간 최후의 권세자가 아님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고 빛이다. 빛이 어둠속에 비취면 어둠이 이기지 못한다. 나사로는 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시 죽음에 속해 묶여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이 또 한 사람으로서 나사로였다. 주님은 그런 영적 나사로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가도록 그들의 이름을 한명씩 불러주신 것이다. 이 나사로는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오늘 우리들이다. 우리도 언젠가 죽을 것이지만 오늘도 우리는 창조된 본래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죽음의 권세에 매여 살고 있다.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충만하게 살지 못하기에 우리는 삶 속에서 죽음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의 나사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나사로를 보고 주님은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부르신다. 주님은 매주 우리 곁에서 우리 각각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야, 너 나오라고 부르신다. 일어나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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