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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가려줄 겉옷이 있는가?(창9:20-27)
노아는 당대의 의인으로 칭송받았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의 허물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성경이 노아의 의로움을 보존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드러내기를 더 원하기 때문이다. 홍수 이후 노아는 술에 취하여 벌거벗은 채로 잠들었다. 벗이 없어 외로웠기 때문일까, 모든 것이 다 사라진 세상을 보는 노아의 심정이 허망했던 것일까?
노아는 인류 대표로 하나님에게 뽑힌 당대 의인이었다. 대단한 인물이었고 홍수 이후 350년을 더 살았지만, 술에 취하여 하체를 드러낸 이 사건만 유일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인간은 완전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완전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공동체도 없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류의 대표로 노아를 출발시켰지만, 그도 실수가 있고 불완전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아가 그랬듯이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 혹은 ‘언젠가’는 불완전한 존재가 된다.
노아의 허물을 본 세 자녀의 반응이 달랐다. 둘째 아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렸다. 그러나 첫째와 셋째는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질하여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주었다. 여기서 ‘보다’는 말은 힐끗 본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서 관찰하듯이 보다는 뜻이다. ‘알리다’는 말은 아버지의 실수를 떠벌렸다는 뜻이다. 함의 태도가 심각한 것임을 그와 그의 아들이 받은 저주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함의 행동은 불의한 자가 의로운 자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의 ‘놀라운 기쁨’ 같은 것이다. 노아는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사람인데, 그의 허물을 가슴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고 떠벌리는 것은 타락한 즐거움이다.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한 사람의 허물을 발견했을 때 우리 안에도 은근한 즐거움이 있다. 죄성이다.
셈과 야벳은 겉옷을 가지고 아버지의 허물을 가려주었다. 의인이 허물로 수치를 받더라도 내가 상대적으로 그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식으로 우월감을 즐기기 전에, 그의 허물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은혜로 그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다 한계가 있고 모자란 사람이고 결함이 있기에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허물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서로 감수해야 한다. 나의 모자람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모자람과 부족함을 감수해야 한다. 갈6:1에서 말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그 일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온유한 마음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한다.
우리도 남의 허물을 가려줄 겉옷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옷 입게 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가려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의 겉옷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겉옷을 입고 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수치를 느꼈을 때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어 그들의 허물을 가려 주셨다.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움은 어쩔 수 없다. 그 부끄러움은 가려져야만 한다. 가려질 때 의롭고 아름답게 된다. 주님이 이땅에 오신 것도 우리의 허물을 가려주시기 위함이다. 이 겉옷으로 서로의 허물에 대해서 가릴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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