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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신비(욥42:1-6)
고난 없는 인생은 없다. 최초의 가정에서도 자식이 자식을 살해하는 일이 일어났다. 부모가 얼마나 아파했을까?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시90:10)라고 했다.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다. 그런데 욥보다 큰 고통을 당한 사람이 있을까? 그 많던 재산과 종들, 자녀들까지 한번에 다 잃었다. 고난이 깡패처럼 떼를 지어 몰려왔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하나님이 보증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욥의 고난은 더 아프다. 신자의 고난은 비신자의 고난보다 더 아프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생각이 괴로움을 더하기 때문이다. 고통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고난에 욥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처음에는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고 찬양했다. 많은 신자가 여기까지만 알고 욥을 인내의 화신으로, 고난에 대한 승리자라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욥기서는 1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42장까지 되어 있다. 3장에 가면 욥은 비통한 마음을 쏟아내고 있다. 3장부터 37장까지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원망한다. 어떻게 나를 이 지경에 처하도록 만들 수 있느냐고 탄식한다.
욥은 천상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다. 사실 하나님이 욥에게 말할 수도 없다. 말한다면 이 고난은 원천무효가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참소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주장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침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욥은 계속 내가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에게 따져 물었다. 욥은 하나님께 버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하나님이 낯설고 자신의 고통에 무관심한 듯 보인다. 욥의 고통 중에서 이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일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이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는 말이냐, 그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욥을 책망했다. 친구들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욥을 판단했다. 그래서 고난을 욥의 탓으로 돌리고 욥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이 정의로운 것은 진리다. 그런데 우리는 진리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진리보다 더 크신 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건 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38장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에게 질문을 시작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38:4) 하나님은 욥에게 창조의 신비를 보라고 한다. 하나님의 장엄한 신비 앞에 욥을 데리고 간다. ‘왜’라는 질문은 ‘누구신가’라는 질문 앞에 압도 당한다. 그러자 욥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보다 더 큰 하나님을 만난다. 귀로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고 고백한다.(욥42:5) 고난 앞에서 ‘왜’ 라고 묻지만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보다 더 크신 분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고난을 낭비하지 않고 이 고난을 통해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하는지 묻고 또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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