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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왕하7:3-9)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가져온 종에게 주인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악한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게으를 수 있는 사람이다. 주님은 악한 것과 게으른 것을 똑같이 말씀하고 있다. 게으름 가운데도 영적인 게으름은 더 악한 것이다. 죄성이다. 영적 침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해야 한다. 설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몸부림을 쳐야 한다.
본문에 네 사람의 나병 환자가 나온다. 그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적군의 진지로 가서 살게 되었다.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을 때 일이다. 압박의 시간이 흐르면서 사마리아 성 내에서는 물과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끔찍한 일도 벌어졌다. 성 밖에서 살던 나병 환자에게도 당연히 양식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성 내에서 나오는 음식물에 의지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3절) 그들은 성 내로 들어가도 죽을 수밖에 없고 가만히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아람 군대에게 가서 항복하자고 한다. 만에 하나 아람 군대가 살려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 안으로 들어가면 죽을 확률이 100%, 가만히 있어도 죽을 확률이 100%, 아람 군대에 항복하면 죽을 확률이 99.999% 쯤 된다. 0.001% 살 수 있는 확률을 가지고 그들은 적군의 진지로 향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적군의 진지에 식량과 물건은 그대로 있었지만, 적군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병 환자들이 적군의 진지를 향해 갈 때 적군들은 대군이 몰려오는 환청을 듣고서 두려워하며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급히 도망가버린 것이다. 하나님이 네 사람의 나병 환자의 발걸음을 어마어마한 군대의 발걸음으로 증폭시킨 것이다.
나병 환자들은 우리가 어찌하여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릴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 말은 사마리아 성안에 있는 사람은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도 된다.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과 죽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일어나는 사람은 다르다. 전자는 수동적이고 끌려가는 사람이고 후자는 적극적이고 주도하는 사람이다. 본문의 교훈은 0.001%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일어서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말의 뜻은 살아나라는 명령이다. 어떤 상황 어떤 처지에서라도 살아내라는 것이다. 가장 거룩한 것은 생존 그 자체이다.
사람들 안에는 끌려가기를 좋아하는 본성이 있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고 적당히 휩쓸려가려는 본성이 있다. 어둠 속에 주저앉고 싶은 본성이다. 다수의 사람들이 하는대로 적당히 묻어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영적 게으름 때문이다.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사람들과 같은 본성이 우리 안에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 것이 분명한데도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약해지고 우리 안에 있는 영적 게으름이 작동하고 있다. 세상이 거대한 사마리아 성이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 길로 가고 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살아나라고 하신 것이다.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작은 가능성이라도 붙잡고 몸부림이라도 쳐야한다. 그때 주님은 일하실 것이다. 기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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