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성숙도를 ‘불명확성을 수용하는 능력’으로 정의했습니다.
우리는 가능한 모든 것을 흑백 논리에 따라서 구분하려고 합니다.
옳든지 그르든지, 잘하든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인생을 오래 사신 분들은 인생이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합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악한 면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도 선한 면이 있더라.’
‘바른 의견에도 틀린 점이 있고, 틀린 의견에도 바른 점이 있더라’
인생에서 이런 점을 깨닫는 것이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바울 사도는 섣부르게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첫째 이유는 그 사람이 그렇게 하는 동기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고전4:5),
둘째 이유는 판단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롬14:10)
우리는 다른 사람이 행하는 일에 대한 동기를 섣불리 추측합니다.
자신의 경우를 대입해 추측하는 것은 그 사람을 자기 수준으로 낮추어 보는 교만과 다르지 않습니다.
미숙할수록 이런 실수를 자주 하게 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기려면 우리가 성숙해져야 하지만,
거꾸로 이런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는 성숙할 수 있게 됩니다.
남을 보이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것은 불완전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남의 불완전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함도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불평과 긴장 가운데 살게 됩니다.
‘성경에도 완전해지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완전한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5:48)
그런데 여기서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편파적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선한 사람 악한 사람에게 동일한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처럼 선한 사람뿐만 아니라 악한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물론 완전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주님의 완전함을 닮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나도, 이웃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