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집사님이 “기도해도 안 될 사람은 안 되고, 기도 안 해도 될 사람은 다 되더라”며 자조적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이게 우리의 현실일 수 있다.
기도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사람이 있고, 기도 안 해도 잘 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기도는 왜 하는 것일까?
만약 기도하는 이유가 ‘잘 되는 것’에만 있다면 기도하는 것이 무용하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잘 되는 것’은 세상의 기준으로 ‘잘 되는 것’을 말한다.
사업 성공, 좋은 학교 진학, 승진, 좋은 배우자와의 만남 등등. 우리는 종종 소위 ‘잘 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한다. 그러나 기도하는 목적이 ‘잘 되는 것’에 있으면 다른 종교에서 기도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기독교인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나 무속 종교에도 기도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비나이다’ 간절하게 소원을 빌지만 ‘잘 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기도를 듣는 분이 누군지 아무런 관심도 없다.
기도를 듣는 분이 석가모니면 어떻고, 조상신이면 어떻고, 예수면 어떻냐는 식이다.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면 누구든지 O.K다.
만약 교회에서 자신이 잘 되는 것만 기도하면, 이런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비나이다, 비나이다’ 한 다음 하나님 이름만 끼워 넣으면 된다.
물론 우리도 잘 되는 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잘 되는 것을 위해서 땀 흘리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노력은 하지 않고 기도로 쉽게 먹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아야 한다.
노력하는 대신에 기도로 쉽게 얻으려 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사람들이 기독교를 우습게 본다. 노력해서 얻어야 하는 것은 일단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하되, 우리의 기도는 세상과 차원을 달리해야 한다.
내가 잘되는 것이 이웃 사랑을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서 노력해서 얻을 수 없는 것들, 사람들이 도무지 관심 갖지 않는 것을 구해야 한다. 사랑하는 일, 용서하는 일, 화해와 평화를 만드는 일 등등.
예수님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이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그 나라와 그의 의가 우리 기도 제목이 될 때 세상은 우리를 얕잡아 보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