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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중심을 살펴보라(삼상16:1-13)
다윗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폐위시키고 새 왕을 택하여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이 왕이 될 것이니, 베들레헴에 가서 기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우라고 하신다. 사무엘은 그 명령을 받들어 베들레헴에 와서 이새의 아들을 차례대로 만나본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새의 큰아들 엘리압을 보았을 때, 사무엘은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고 직감적으로 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시고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7절)고 했다. 여기서 ‘중심’은 ‘마음’을 의미한다. 중심은 어떤 기준과 원칙이 있는 자리, 자기 정체성이 있는 마음의 자리이다. 엘리압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 본문은 그것을 하나님이 그를 버렸노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무엘은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면접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양을 치고 있던 막내 다윗이 빠졌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즉각 그를 불렀다. ‘막내’라는 단어는 ‘보잘것없는’, ‘하찮은’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은 너무 보잘것없어서 아버지가 데리고 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다윗이 돌아왔을 때 사무엘은 “얼굴이 아름답더라”(12절)고 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단어는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할 때 사용된 ‘토브’다. 즉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내면이 온전한 상태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그 중심에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었다. 사람들이 볼 때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고자 하는 치열함과 간절함이 있었다. 그의 중심은 지난주 부활한 예수님을 처음 만난 막달라 마리아의 중심과 다르지 않다.
본문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과 택한 사람을 분명히 대조해서 보여준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 세상의 기준은 외모이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중심이다. 신자도 두 종류가 있다. 외모추구형 신자와 중심추구형 신자가 있다. 두 사람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이 다르다. 외모추구형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중심추구형은 하나님을 바라본다. 바리새인들은 외모추구형 신자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라고 할 때 ‘나은’이라는 것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다. 외모를 넘어서 중심까지 살펴야 더 나은 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지독하게도 나를 추구한다. 자기를 버리기가 너무 어렵다. 사울은 선지자가 와서 드려야 할 예배를 자신이 주도해서 드렸다. 전쟁에 속히 출정하기 위함이다. 그는 하나님의 전쟁을 자신의 전쟁으로 바꾸고 말았다.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어도 자주 욕망에 휘둘리며 자주 실수하고 자주 죄를 짓는다. 그렇다면 중심에 하나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무엇인가? 중심에 하나님이 있을 때는 죄와 허물에 더 민감해진다. 그리고 더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죄지었을 때 다윗의 회개가 그것을 말해준다. 중심도 흔들릴 수 있다. 성령은 바람 같아서 불어 올 때는 존재가 느껴지지만 바람이 지나간 뒤에는 아무런 느낌도 생기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모시는 법을 배우고 자주 자신의 중심을 살펴서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주님이 기대하시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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