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나눔터
HOME > 나눔터 > 나눔터
관계의 한계를 느낄 때(삼하18:33, 시3:3)
자식을 키울 때 더 좋은 부모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많은 자책감에 빠졌던 적이 있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지만 결심한 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키워보리라 하고 그렸던 큰 그림대로 자녀는 자라지 않았다. ‘어떻게 아빠가 그럴 수 있어요’라는 말을 자녀에게 처음 듣게 되었을 때 무척 당황했다. 자녀를 위해서 사랑을 베푼다고 한 일인데 그게 사랑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될 때 부모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한계를 느끼게 된다. 부모 역시 ‘내가 사랑한 자식이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며 자녀와 동일한 관계의 환멸을 느끼게 된다. 서로가 관계의 한계에 마주치는 때가 온다.
어린 시절 자녀에게 부모는 큰 산과 같은 존재다. 절대적 존재다. 약자인 자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절대 강자인 부모를 의지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일종의 신과 같은 존재로 부각된다. 부모는 자녀의 그런 기대에 부합하도록 자식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자녀는 우리 부모가 완벽한 존재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자라면서 부모의 부끄러운 과거와 어두운 시절 이야기도 알게 된다. 자식에게만은 깨끗하고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어했지만 그런 환상은 깨어지고 무력하고 초라한 모습으로만 보일 뿐이다.
이런 일이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에게도 일어났다. 다윗도 자녀에 대한 큰 그림을 가지고 자녀를 잘 키워보고 싶었을 것이다. 자녀들이 기대하는 아버지로서 큰 존재로 남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국 아들에게 배신 당하는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의 왕 자리가 탐나서 아버지를 죽이기로 작정하고 반역을 일으켰다. 왕궁에서 아버지를 내쫓고 대낮에 천막을 쳐놓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했다. 천하의 패륜 자식이다. 이 사실이 전달되었을 때 다윗은 얼마나 환멸감을 느꼈을까? 자식에게 짓밟힌 초라한 아버지로서 자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관계의 한계는 살아가는 순간마다 경험할 수 있다. 부모 자식 관계가 아니라도 우리가 믿고 의지하던 관계가 깨어지고 배신하고 배신당하면서 관계의 환멸을 느낄 수 있다. 부모와 자식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목사에 대해서도 관계의 환멸을 느낄 수 있다. 어떻게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목사가 그럴 수 있는가? 어떻게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대부분 기대감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부모 편에서 자식이 이렇게 해주리라는 기대감, 자식 편에서 부모가 이렇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가 채움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관계의 한계 앞에 서게 된다.
사실 이 땅에서는 어떤 존재도 우리의 기대감을 만족시킬 수 없다. 부모도 목사도 교회도 기대감을 채워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관계의 한계에 대한 환멸이 찾아올 때가 은혜의 순간이 될 수 있다. 환상이 깨어지는 순간 진실을 대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아들과의 관계가 깨어진후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3:3) 그때 다윗은 오직 주님만 바라본다. 부모로서도 자식으로도 우리가 서로 기대감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아니다. 그것을 알게 될 때 참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