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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고후6:1-2)
본문은 지금이 은혜받을만한 때고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하였다.(2절) ‘지금은’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권면하고 있는 때다. 교인들이 바울의 메시지를 읽고 있는 바로 그때가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때다. 사람들은 종종 구원의 때가 앞으로 오리라 생각하여 지금 여기에 있는 구원의 기회나 은혜를 발로 차버릴 수도 있고 늦장을 부릴 수도 있다. 그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이라고 한다.(1절)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하였다.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통해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이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이 은혜의 때이고 구원의 때인 것은 지금 현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현재를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시간을 ‘영원’이라고 부른다. 영원은 시간의 양적인 확장이 아니다. 본래 시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라는 시간과 천지라는 공간을 만드셨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에 매이지 않는다.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영원은 시간이 없다는 뜻이지 시간이 무한정 확장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이 없지만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산다. 우리 시간은 과거로부터 와서 현재에 머물다가 미래로 간다. 우리는 이 시간의 흐름을 연대기적으로 기억한다. 몇 년 몇월 며칠 몇시 등 시간의 단위를 쪼개어서 양적으로 축적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기억한다. 이것을 헬라어로 ‘크로노스’라고 한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만나실 때가 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들어오시는 때를 ‘카이로스’라고 부른다. 카이로스의 때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시간이다. 이때 우리는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이 들어오는 이 시간을 영원한 현재라고 불렀다.
벧전3:8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는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고했다. 주님은 시간을 양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하루가 천년 같을 수도 있고 천년이 하루 같을 수도 있다. 사람마다 인생의 양이 다르다. 일찍 죽는 분도 계시고 오래 사시는 분도 계신다.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일까? 그 시간을 크로노스로만 산다면 시간 낭비가 될 수도 있다. 어떤 분은 짧게 사시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자처럼 산다. 그런 사람은 짧게 살지만 영원을 사는 것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현재를 사는 사람이다.
성경은 언제나 오늘이 구원의 날이고 은혜의 날이다. 오늘을 건성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건성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모욕이다. 예배를 드려도 건성이고 기도하는 것도 건성이라면 우리는 현재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오늘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했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린 강도에게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은 언제나 오늘이다. 오늘 현재 안에 하나님이 머물면 현재는 하나님의 부피만큼 크지고 중요해진다. 시편기자가 노래했다.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시118;24) 오늘을 놓치 않는 것이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는 것이다.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일이다. 코로나 이후를 걱정하지 말고 오늘 현재를 영원한 현재로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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