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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이웃인가?(눅10:25-37)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시험한다는 것은 자기 생각하고 예수님 생각이 맞나 안 맞나를 확인하려고 한다는 뜻이다. 바리새파 율법주의자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하고 질문했다. 율법 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맞다. 이것을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것을 행하라고 하였지만, 율법 교사는 다시 내 이웃이 누구인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이웃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셨다. 우리에게 이웃은 그냥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계속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웃의 범위를 한정했다. 이웃의 범위가 넓으면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방인이라면 당연히 이웃이 아니라고 했고,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도 바리새파가 아니면 이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바리새파 사람만 이웃으로 한정해 놓고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냐는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하지 않고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36절에서 결론적으로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하고 물으신다. 이 질문이 묘하다. 율법 교사는 이웃이라는 존재를 이미 규정된 상태로 생각하여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이웃이라는 존재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고 이웃은 사랑을 베풂으로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하는 관계이지 미리 정해진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으신 것이다. 이웃은 만들어가는 것이지 자기를 중심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도 바리새인처럼 이웃을 미리 규정해 놓고 살지는 않는가? 대개 마음이 통하고 취향이 비슷한 사람, 나에게 적대적이지 않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이웃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다른 종교인은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북한도 이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웃이란 내가 계속해서 만들어가는 관계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 예수님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었을 때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웃은 이미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과 아픔에 빠진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이웃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라고 했다. 왜 예수님은 하필 사마리아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가? 율법 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도 입에 올리기 싫어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했다. 어디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 하면, 원수 같은 사람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이웃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생략한 말씀도 있다. 사실 이런 사랑을 죽을 때까지 계속 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받은 강도 만난 사람은 이런 사랑을 계속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은 우리가 모두 인생길에서 강도 만나서 죽게 된 사람이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긍휼함을 입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긍휼함을 입지 않고는 이웃을 사랑할 수도 없고 확장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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