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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자를 찾아서(눅19:1-10)
대림절 마지막 주일, 삭개오를 통해서 각자의 마음을 살펴보면 좋겠다. 삭개오는 치열한 생존 경쟁을 뚫고 성공한 사람이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도 큰 부를 축적했다. 2절에서 그는 여리고의 세관장으로서 부자라고 소개되고 있다. 세관 업무를 통해서 큰 부를 축적한 사람인 것을 암시하고 있다. 성공했지만 그는 동족들에게 최고의 혐오 대상이었다. 그들은 그를 죄인이라고 여겼다. 삭개오는 돈이 있지만 친구도 이웃도 없었다. 성공한 사람이지만 손가락질 당했다. 어쩌면 삭개오의 내면에서 ‘이렇게 사는 게 전부인가?’라는 질문이 생겼던 것 같다.
우리에게도 삭개오의 모습이 있다. 거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에서 이겨보려고 몸부림쳤다. 성공의 사다리를 조금씩 올라가면서 잃는 것도 많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소중한 사람들을 잃는 것이다. 가족, 친구, 교우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다. 정신없이 살면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살고 있나’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에게는 영혼이 있다. 그래서 내면에서는 ‘이게 전부가 아닌데’ 하는 배고픈 생각이 자꾸 떠오른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삭개오는 예수님이 보고 싶었다. 사실 예수님은 삭개오가 만나기 가장 부담스러운 존재인지 모른다. 돈에 대한 가르침이 엄격했기 때문이다. 괜히 그를 만났다가 어떤 핀잔을 들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으로 예수는 세리의 친구라 하고 어떤 세리는 그를 만나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를 한번 보기까지 안팎으로 장애물이 있었다. 자기 키가 작았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옆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려고 가로수 위로 올라가는 사람은 없다. 그만큼 삭개오는 예수가 절실했다.
나무에서 삭개오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삭개오! 빨리 내려오게. 내가 오늘 그대의 손님으로 가야겠네. 그대의 집에 묵겠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삭개오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삭개오의 공허와 슬픔과 영적 배고픔까지 다 안다는 뜻이다. 삭개오 집에 머무는 것은 그를 비판하고 그의 죄를 따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의 친구이니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도 같이 하자는 뜻이다. 삭개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말이었다. 자기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삭개오는 재빨리 내려와서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였다. 뭐가 그렇게 즐거웠을까? 예수님이 그의 병을 고쳐 준 것도 아니고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도 아니다. 다만 그의 집으로 오신다고 하는 것이 기쁜 것이다. 집에서 삭개오는 급진적인 선언을 한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줄 것이고 만일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갑절을 갚겠다고 한다.
삭개오는 예수님 때문에 너무 배부르게 되었다. 가진 것을 다 잃어도 괜찮다고 할만큼 배부르게 되었다. 그에게 지금 예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고 압도적이다. 이런 삭개오를 보시고 예수님은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배부르시게 하기 위해서 살과 피로 오셨다.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동네에 나를 찾아 이사오셨다. 그리고 나를 잃어버린 자라고 하시고 찾으신다. 우리 안에도 삭개오와 같은 배고픔이 있을까? 대림절에 자기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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