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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 같아야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눅18:9-17)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한 비유 말씀이다. 한눈에 쓱 보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님이 응답하시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 것 같다. 그리고 겸손하게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본문은 겸손보다 더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누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하는 문제다. 즉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중요한 본문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고 구원받는다고 한다. 그러면 구원을 얻게 해주는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비유에는 바리새인과 세리 두 사람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대조적인 사람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가진 선입관으로 이들을 단순히 흑과 백이라는 이분법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은 교만한 위선자이고 세리는 겸손한 기도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미루어 보면 그는 훌륭한 사람이다. 토색, 불의, 간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빠짐없이 드리는 사람이다. 거짓말하거나 잘난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는대로 말한 것이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자기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고해서 세리를 애처롭고 겸손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는 만나는 사람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부패하고 가증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이 기도한 후 충격적인 판정을 내리신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다.
바리새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는 자기를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다. 의로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스스로 의롭다고 믿었던 것은 자기가 바람직한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의롭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어떤 바람직한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착각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이 행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달리 판단한다. 그에게 세리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바리새인이 놓친 것은 마음의 흐름이다. 행동은 불연속적이다. 좋은 행동을 할 때도 있고 좋지 않은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흐름은 연속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쁜 사람도 일시적으로 좋은 행동을 할 수 있다.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자기는 죄인이라 하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에게 구한다. 세리도 나쁜 일을 많이 한 사람이지만 가끔 좋은 일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 마음의 흐름을 볼 때 자기는 죄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없다면 도저히 바로 설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하니 나를 구원해달라고 주님에게 의지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면 아이의 갖가지 모습 가운데 어떤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 모든 아이의 공통점은 부모를 의지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가장 큰 두려움은 지금 자신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의 두려움은 부모가 없다는 것 자체이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것은 부모에게 부탁하면 된다. 구원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그 앞에서 나의 실상을 아뢰고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님을 의지합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엎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자비하심에 자기를 던지는 의탁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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