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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경외함(창22:12)
언젠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본문 이야기를 묵상하다가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는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들어왔다. 평소 ‘경외’라는 단어를 큰 무게감 없이 가볍게 사용해온 터라 여기서 사용된 ‘경외’라는 단어가 약간 충격적이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누구나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무섭고도 엄청난 행위를 하나님이 경외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실력도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자로 경외(敬畏)에서 ‘경’(敬)은 공경한다는 뜻이고, ‘외’(畏)는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경외는 공경하면서 두려워한다는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할 때 공경은 히브리어로 ‘아카드’이고 무거움이라는 뜻이다. 부모가 자식보다 배우지 못하고 덜 똑똑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못 배운 부모도 자녀보다 더 큰 세월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그 삶의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다. 부모가 먼저 걸어온 세월의 무게를 인정해 드리는 것이 공경이듯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무게를 인정해 드리는 것이 경외함이다.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경외함을 가지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명령 앞에서 순종했다. 아브라함의 순종이 기계적인 순종이 아니다. 자기는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하나님의 무게를 생각한 것이다. 그 무게를 존중해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3일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었다. 하나님과 내가 얼마나 다른지, 하나님과 나의 무한하고 영원한 질적 차이를 알고 하나님을 인정해 드리는 마음으로 순종의 길을 갔다. 그것이 경외함이다. 경외함은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크신 분임을 알게 될 때 생기는 감정이다.
우리는 위대한 자연 앞에서도 그런 경외감을 가질 때가 있다. 웅장한 자연 속에서 아름다움을 볼 때 우리는 압도 되는 경외감을 느낀다. 그 앞에서 감탄하고 놀라워하고 나는 작고 미미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위대한 사람을 만날 때도 그런 감정이 든다. 수단에서 봉사하다가 소천한 이태석 신부 영화를 보면서 참 대단하신 분이라고 느껴졌을 때 그분에 대한 경외감이 들었다. 내가 좀 잘못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도 들고 한편으로 그분처럼 살고 싶다는 열정도 생겼다. 경외감은 자기를 넘어서게 해준다. 자기라는 껍질을 깨고 지금보다 더 성장하게 해준다. 경외감이 나보다 더 큰 존재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작아지고 위축되는 두려움이 아니다. 작지만 나보다 더 크신 존재를 향해 발돋움하게 만든다. 이해 되지 않고 용납할 수 없는 말씀 앞에서도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된다.
아브라함이 이전에 경험했던 하나님은 자기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시다. 갈대아우르에서 살고 있을 때 자기를 부르셨던 하나님, 사라의 경수가 끊어졌지만 기적같이 이삭을 주신 하나님, 아들 이삭을 통해서 열방을 복주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지금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하나님의 크심 앞에 자기를 내려놓고 묵묵히 순종했다. 오늘 당신은 하나님을 얼마나 무겁게 생각하는가? 경외함으로 그분 앞에 설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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