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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다(요8:31-36)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는 장면이다. 이 유대인들은 31절에 의하면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이다. 믿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모두 참 신자는 아니다. 예수님은 참 신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다. 믿는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가 누구의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우리가 자유롭게 되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자기 인식이 달랐다. 그들은 자유인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종이라고 하셨다. 오늘 우리 모습이 이 유대인들과 같지 않은지 살펴 보아야 한다. 자유하다고 생각하지만 주님이 보실 때 종이 아닌가?
젊은 시절 한때 나는 예수 믿는 것이 속박당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일주일 하루 쉬는 날에 밖으로 놀러 가지도 못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은 나에게는 굉장한 제약이었다. 내 자유가 박탈당한 것이라 생각했다. 성경 읽다가 “예수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는 말씀이 나오면 부담스러웠다. 나는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었는데 예수 믿고 구원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내가 누리는 자유를 제약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정확하게 반대로 이야기하신다. 사실은 우리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 이미 우리는 속박되었고 노예 상태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오래 시간이 걸렸다.
그때 내 상태가 ‘죄의 종’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예수님의 진리 말씀이 나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배웠고 말씀에 거하려면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는 것이 무슨 규칙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고 어느 정도 진리가 주는 자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리가 내 안에 체화되고 말씀이 내 인격과 삶에서 구현될 때 얻게 되는 자유가 있었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것은 아무런 구속없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타락한 욕망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기가 쉽다. 그런데 이 마음을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드리면 본래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대로 나답게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되어야 할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운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이지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자유로운 삶이다. 코스모스가 코스모스가이 되고 개나리가 개나리가 될 때 자연스럽고 자유롭다. 코스모스가 개나리가 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가 피아노에서 참된 자유를 얻으려면 피아노 규칙을 익히고 그 규칙과 하나될 정도로 자기 몸에 체화되어야 한다. 엄마 손을 잡고 시장통에 갔던 아이가 자유롭고 싶다고 해서 엄마 손을 놓으면 그순간 아무데도 가지 못한다. 그러나 엄마 손을 잡고 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을 잡고 그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우리가 누리는 자유함이 있다. 그 자유함은 한계가 없다. 죽음도 질병도 빼앗아갈 수 없는 자유가 있다. 오늘 직분 받으시는 분들도 하나님이 정하신 틀속에서 거하게 되었지만 그 틀은 속박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하는 틀이 될 것이다. 진리가 주는 자유함을 맛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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