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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기쁨(요3:22-30)
우리는 보통 내가 크게 부각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뛰어나고 더 큰 사람으로 주목받기 원한다. 그러면 내가 성공한 사람이고 그 성공으로 인해서 참 기쁘다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정반대의 기쁨을 가지고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작아지고 약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다. 29-30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자신의 역할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이 예수님보다 더 작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그는 기뻐하고 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과 세례요한을 따르는 제자들이 서로 견제한다. 예수님이 등장한 이후에도 세례요한은 계속 세례를 주었고, 예수님도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 근처에서 세례를 주었다. 재미있는 상황이 되었다. 갑자기 세례를 주는 두 집단이 생긴 것이다. 문제는 세례요한에게 가는 사람보다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 것이다. 세례요한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역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요한 선생님이 뒤로 밀려나는 것 같은 위기의식이 들었다. 저쪽으로 다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지? 하는 근심을 드러내자 세례요한은 27절 이하에서 답변한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갑자기 떠올라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일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다. 그분은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주인공이고 나는 그분을 준비하는 자이기 때문에 그분의 들러리에 불과하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분께 더 많이 가고 그분이 주목을 받는 것이 옳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당연한 듯 보이는 말이지만 여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세례요한의 깊은 영성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보다 더 큰 존재로 보이기를 원하고 실제보다 작은 자가 되거나 작게 보이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도 자주 예수님보다 내가 더 주목을 받고자 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고싶어한다. 그래서 내 이름을 내는데 있어서 참 많은 시간을 들이고 내 능력을 과시하는데 집중한다. 내가 예수님보다 더 빛나기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지 모른다. 어쩌면 세례요한처럼 오랜 시간을 광야에서 힘들게 보냈던 시간도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결국 내 사역이 줄어들고 내가 작아지는 그런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상황을 모욕이나 실패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요한의 말처럼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자신을 작게 여기고 작게 되는 것으로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이 남다른 세례요한의 기쁨이다. 지난주에 임직받으신 분들 그리고 오늘 여기에 앉아 계신 여러분들에게 이런 기쁨이 있는가? 주님이 주인공이셔야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작아지고 약해지는 경우가 있고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이 주는 기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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