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나눔터
HOME > 나눔터 > 나눔터
빛으로 오신 분(요1:1-14)
예수님은 빛으로 오셨다. 본문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했다. 예수님을 향해서 “참 빛”이라고 한 것은 참 빛이 아닌 다른 빛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다른 빛은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자연의 빛을 의미한다. 이 빛은 하나님이 태초에 만드신 빛이다. ‘빛이 있으라’ 하니 혼돈과 공허로 가득 차 있던 세상에 생명들이 가득하게 되었다. 5절에서는 이것을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다. 깨닫지 못한다는 원어의 뜻에는 ‘이기지 못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하니 어둠이 빛을 막거나 회피하지 못하고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어둠이 빛을 영접하니 결과적으로 흑암이 깊고 혼돈과 공허가 있던 곳에 생명들이 가득차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빛과 함께 우리 영혼까지 살려면 참 빛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참 빛을 보내주셨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4:16) 예수님을 빛이라는 은유로 말씀하시는 것은 빛의 독특한 성질 때문인 것 같다. 빛은 그 자체로 자기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주변 세계를 드러내 주는 성질이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수님이라는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10, 11절)
여기서 세상은 세상 사람을 뜻한다.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존재하고 사는데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다.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유한함이나 무지함 때문이 아니다. 성경이 알지 못한다는 것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다는 뜻이다. 마치 지금 밖에서 태양이 비치고 있는데 암막 커튼으로 창문을 가리고 전깃불이 진짜 빛이고 빛의 전부라고 고집부리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다. 태초에 있던 흑암은 하나님이 주신 빛을 받아들여서 생명의 공간이 되었다. 우리도 참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다.
참 빛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분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그도 빛이 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하였다. 우리는 스스로 발광체가 될 수 없는 자들이지만 참 빛이신 예수님의 빛을 영접하여 세상에 보여주는 반사체가 될 수 있다. 이현주 목사는 “내 눈 또한 유리에 지나지 않으니”라는 시에서 말한다. “바깥세상이 방 안보다 환하면 / 유리창이 바깥세상을 보여주지만 / 방안이 바깥세상보다 환하면 / 유리창은 방 안 풍경을 보여준다 / 유리는 더 밝은 쪽 편인 게 분명하다....” 따라서 바깥세상이 우리 마음보다 더 환하면 우리는 자주 바깥세상만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바깥세상보다 밝으면 나도 나 자신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고 세상도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빛이 어디에 있고 어디가 더 밝은지가 중요하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빛이 ‘각 사람’에게 비추는 것은 이제 각 사람에게 모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각 사람이 그 빛을 자각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대림절 셋째 주일이다. 빛으로 오신 주님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여 세상보다 더 밝은 빛을 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보게 해야 할 것이다.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