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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임지겠습니다.(욘1:11-16)
요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다. 갑자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파선 직전에 이르렀다. 선원들은 두려움으로 인해 우왕좌왕하는데 요나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잤다. 선장이 내려와서 그를 깨운다.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선장의 요청 때문인지 요나는 한배에 타고 있는 ‘우리’를 인식한 것 같다. 여전히 하나님은 외면했지만, 이웃의 고통을 보게 되었다.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네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요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하면서도 지금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중이라고 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던진 질문은 요나의 사명과 자기 정체성을 돌아보게 하였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이지만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는 중이라는 다소 모순된 말을 하였지만, 이 말은 지금 요나의 자기 실체를 고백하고 있는 말이다. 고통 받는 이웃과 함께 지금 요나는 자기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폭풍이 심해지자 뱃사람들은 요나에게 어떻게 하면 바다가 잔잔해지겠느냐고 묻는다.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면서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한다. 요나가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는지 짐작하기 어렵다. ‘내가 불순종해서 일어난 일이니 나는 죽어도 마땅하다는 뜻일까?’ 아니면 ‘하나님에게 순종해서 니느웨에 가느니 차라리 난 여기서 죽겠다는 뜻일까?’ 반항하다가 갑자기 순종하는 것도 급작스럽다. 죽기까지 불순종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배를 타기 전에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요나는 아직 하나님을 바라보지는 않고 있다. 다만 자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의 현실을 알았고 이 상황은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제비에 뽑혀도 내가 아니라고 우길 수도 있고 이런 상황은 나 때문이 아니라고 끝까지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가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지금 하나님을 피해 도망가는 중이기 때문에 자기 때문에 초래된 일이 맞다고 했다.
우리도 자주 다시스로 가다가 어려움을 만나지만 요나처럼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인정하며 책임지지는 않는다. 나도 잘못한 것이 있지만 당신들도 잘못이 있고 그냥 우연히 일어난 일도 많다고 하면서 내 책임을 흐려 놓기도 한다. 한 공동체의 가장 큰 어른은 연세가 많으신 분이 아니라 책임을 지는 분이다. 요나처럼 책임을 지려면 지금 이 상황을 돌아보아야 할뿐만 아니라 이 상황 때문에 고통에 처한 이웃의 현실도 돌아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각도 필요하다. 예수 믿는 사람은 요나처럼 생각해야 한다. 가정이 어려운 것은 나 때문이고, 교회가 시끄러운 것도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은 갈릴리 시골 사람 제자들에게 온 세상을 맡기셨다. 사도행전에서는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면서 너희가 땅끝까지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고 했다.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서 심지어 모든 민족까지 책임을 지라고 했다. 그러면 성령께서 도우신다고 약속했다.
교회 안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 내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누군가 하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왜 다른 사람은 안할까? 왜 하는 사람이 적을까?”라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이 소중한 마음이다. 우리는 별로 손해 볼 일도 아닌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나는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일인데도 책임을 지려 한다. 책임지는 사람이 많을 때 좋은 교회가 되고 이런 사람 때문에 교회가 더 나은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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