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착한 주인공이 등장하고 따뜻한 내용을 담은 드라마를 즐겨 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착하다 보니 속이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음흉한 사람이 중요한 정보를 캐내려 할 때 감추어야 하는 것을 순진하게 다 말해 버립니다.
그리고 사람이 없는 외딴곳에서 악한 사람에게 “나는 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해”라고 말합니다.
또 악한 사람이 코너에 몰리면 어떤 해코지를 할지 모르는데도 오라고 하면 한적한 곳으로 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하면서 동시에 지혜로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마10: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워야 할 것 중 하나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개인에게 적용되는지, 공동체에 적용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살인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이것을 적용하여 적군이 침범할 때 싸우기를 거부하는 것은 착한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극단적인 반전주의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합니다.
만일 권총 강도가 들어와서 사랑하는 아내나 딸을 눈앞에서 성폭행하려 할 때도 폭력을 거부하고 팔짱만 끼고 있을 수 있을까요?
사형 제도도 그렇습니다.
찬성이나 반대하는 입장 모두 성경을 근거로 계속 논의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계명에 “살인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에 안된다는 논리는 펼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계명은 개인의 사욕 때문에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공동체에 큰 해악을 끼치는 사람은 사형시키라는 명령도 십계명과 더불어 주셨습니다.
지도자에게는 비둘기 같은 순결과 뱀 같은 지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악한 사람들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가 악을 모르고 악한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면 공동체가 파괴됩니다.
예수님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품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손해를 보고 이용당해도 속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속아 주는 것과 진짜 속는 것은 다릅니다.
알면서 속아 주는 것은 순결한 것이고, 진짜 속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