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 엘리어트의 [황무지]라는 시 첫 구절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란 말로 시작합니다.
4월은 일 년 중에 가장 생명력이 넘치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그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불렀을까요?
여기에는 시인의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봄이 되면 자연은 여기저기서 꿈틀거립니다.
하늘에서 봄비가 내리고 봄비는 땅 깊숙한 곳에 가서 잠자고 있는 씨앗들을 깨웁니다.
씨앗은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 있다가 자연의 신호를 받고 그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합니다.
나와야 새로운 생명을 싹틔울 수 있습니다.
물론 껍질을 깨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서 아름다운 향기를 날릴 수 있습니다.
4월이 되면 자연은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서 지금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세계로 향합니다.
그래서 자연에게 4월은 아름다움이고 위대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4월이 되어도 우리 인간에게는 이런 변화가 저절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4월은 부활을 노래하고 춤추며 자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데 우리는 4월이 되어도 옛 자아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자아의 껍질 안에서 움츠리고 있습니다.
자연에는 4월이 왔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4월이 오지 않았습니다.
4월은 자연과 리듬을 맞추고 춤추고 노래하며 기쁨과 아름다움을 주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겨울의 세상을 보내고 있기에 4월은 우리에게 더욱 잔인한 계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에 봄이 오듯이 우리 영혼에도 봄이 와야 합니다.
예수님은 4월에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오늘 우리들의 영혼을 깨우는 봄비가 되셨습니다.
우리 영혼에 내리는 봄비로 우리도 자아의 껍질을 깨뜨리고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나와서 다시 새 생명으로 꽃피워야 합니다.
그러면 온 세상에 임한 4월의 기쁨이 우리에게도 올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4월이 우리에게 잔인한 달이 아니라 가장 복된 달이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