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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롬8:14-17)
사도신경의 고백에 따르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기 신을 위대하고 초월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기독교의 하나님은 친근한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는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부르짖느니라’는 환호성을 지른다는 뜻이다. 가령 고아였다가 부모를 찾았는데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는 분이라고 생각해보라. 환호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하나님이 양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친자녀가 아니라서 실망스러운가? 입양해 보신 분은 양자로 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계획하지 않은 입양은 들어본 적이 없다. 입양은 내가 저 아이에 대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겠다는 결정을 부모가 한 것이다. 입양의 원인이 아이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가 잘나거나 똑똑해서 입양된 것이 아니다. 입양하러 온 부모가 제일 똑똑한 아이를 찾아달라고 한 것이 아니다. 자녀는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 입양의 성공은 오직 부모에게 달린 일이다. 부모가 결정하였고 받아준 것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아들로 삼아 주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 사랑에 달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관계를 주도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항상 살아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라고 믿는다면, 지금 하나님은 어떤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실 것 같은가? 대개는 실망스럽고 화가 난 표정이실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런 대답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진 사람이 하는 말이다. 종은 주인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눈치를 보며 노심초사한다. 자녀는 부모의 인정을 구하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갈 때 아버지에게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라고 해야겠다고 한다. 자기 행위를 근거로 아버지가 그런 생각을 할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다시 얻은 아들이라며 기뻐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비록 내가 부족하고 못난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나아온 것 자체를 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를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 본래 ‘아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예수님도 게셋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셨다. “아빠 아버지여”(막14:36) 또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였다. 본래 아람어로 하면 아빠라고 부르고 기도하신 것이다. 신자의 모습은 하나님을 아빠로 둔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다. 마18:3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는 종교적 규율과 윤리적인 책임에 시달리며 살지 않는다. 규칙에 매이지 않는다. 아빠 앞에서는 늘 즐겁게 놀면서 해맑게 웃는다. 자기가 약하고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삶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녀의 권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돈의 권세, 건강의 권세, 세상 성공의 권세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소중한 하나님 자녀가 되는 축복을 주신 것이다. 이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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