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 가운을 입지 않는 이유
저는 일반적인 예배시간에 목사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이점을 궁금하게 여기시는 분들이 계셔서 왜 그렇게 하는지 간략하게 대답해 보겠습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일상복을 입고 제단에 오르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심지어 예배드릴 때 예복을 착용하지 않으면 죽음의 징벌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 제사장 예복은 제사장의 특권과 책임을 나타내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다음에는 제사장 직분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누구나 예수님의 공로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연히 제사장 예복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생전에 종교지도자들이 긴 옷을 휘날리며 거들먹거리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눅20:46) 물론 초대교회 사도들도 예복을 입지 않았습니다.
중세 시대에 교권이 강화되면서부터 성직자 예복이 등장하게 되었고, 주로 권위와 위엄의 상징이었던 보라색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이후에는 검정색의 학위복이 성직자의 예배 복장으로 일반화 되었습니다.
제가 목사 가운을 입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본래의 정신을 벗어나 목사 권위의 상징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가톨릭과 달리 만인제사장이 성경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이 제사장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목사와 평신도를 구별하려는 시도는 종교개혁 정신에 맞지 않습니다.
요즘은 목사 가운이 점점 더 고급스러워지고 목에 두르는 스톨도 화려해졌습니다. 심지어 요즘은 박사학위를 받은 목사들 가운데 박사 가운의 상징인 세 겹줄을 목사 가운에 넣기도 하고, 전통적인 교회 스톨 대신 박사학위 스톨을 걸기도 합니다. 원래 스톨은 소나 말에게 씌웠던 멍에의 상징이었습니다. 순종과 헌신의 상징이었던 스톨이 권위와 위엄의 상징으로 바뀐 것이지요. 무슨 옷을 입었느냐는 보다는 마음가짐이 어떠냐가 더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옷을 입는 것이 우리 마음가짐을 나타내주기도 합니다. 미사 집례 중 총에 맞아 순교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신부를 소재로한 영화 <로메로>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군인들이 성당을 봉쇄하고 사람들을 쫓아냈습니다. 소식을 들은 신부님이 교회로 달려왔는데 군인들이 신부님을 제지하면서 총구를 들이대고 조롱을 합니다. 신부님은 잠시 후 미사 집전 때 입는 예복을 갖춰 입고 다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총구를 들이댄 군인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뚜벅뚜벅 성당을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그 위풍당당한 모습에 군인들이 기가 죽어 신부님의 행진을 제지하지 못하고, 용기를 얻은 주변 사람들은 신부님을 따라 들어가는 장면이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예복은 자신의 책무와 사명을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엄청난 힘을 가진 예복이었습니다. 가운을 입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긴 옷자락을 휘날리며 거들먹거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입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가운을 입고 제 직분의 소중함을 스스로 환기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된 자로 겸손히 서는 것이라면 자주 입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