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않는 성령님/ 최영기 목사
입으로는 성령님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령님을 부인하는 목사들이 꽤 있습니다.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은사는 성경이 완성되면서 사라졌다는 근거 없는 신학에 매여, 성령님의 사역을 부인할 뿐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는 개인이나 단체를 이단으로 몰기까지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 충만은 ‘영감’ 정도이고, 성령의 은사는 ‘재능’ 정도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님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니까 부인합니다.
성령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두려움입니다. 지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드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에게 자신을 맡긴다는 것이 두려울 수밖에 없고, 맡기지 않으니 체험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체험하지 못하고서 성령님의 사역을 비판하는 일은 극히 조심해야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는지, 진지하게 자신의 동기를 살펴야 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르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 엄중하게 경고하셨기 때문입니다(막 3:29).
(중략)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바람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8). 성령님은 인간의 공식이나 예상을 따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틀에 잡아넣고 공식으로 만들려 할 때 조작하게 됩니다. 이런 조작의 예가 기도 받고 쓰러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오십 년 전 성령의 바람이 거세게 불 때 성령님이 강하게 임하시면 많은 사람들이 감당이 안 되어 쓰러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쓰러지는 것이 성령님이 임하신 증거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해 주는 사람은 상대방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 쓰러뜨리기도 하고, 기도 받는 사람은 기도해 주는 사람의 체면을 생각해서 쓰려져 주는 해프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방언을 연습시키는 것도 비슷한 조작의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성령님은 같은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성령님의 역사를 경험하려면 성령님의 나타나심을 공식화 하려 하지 말고, 성령님이 일하고 계시는 방법을 감지하여 이에 순응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같은 방법으로 두 번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여, 어떻게 새롭게 일하고 계시는지 주의를 기울여 살피고, 성령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좇아야 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항해하는 모토보트가 되려하지 말고, 바람 부는 데에 돛을 맡겨 순항하는 요트가 되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