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나눔터
HOME > 나눔터 > 나눔터
영광의 문(빌2:6-11)
소원이라는 찬양의 가사가 좋아요. 특히 “저 높이 솟은 산이 되기보다 여기 오름직한 동산이 되길. 내가 아는 길만 비치기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비춰준다면” 이라는 가사가 제일 좋아요. 이 가사를 들으면 예수님 생각이 나요.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어요.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길을 이야기 하고 있어요. 가장 낮은 곳으로 오셔서 자신은 고난당하시고 비천하게 돌아가셨지만 우리 모두에게 생명의 길을 비추어 주셨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높여 주셔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 주셨다고 하였어요.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어떤 길로 가야지 영광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가르쳐 주고 있어요.
6-8절까지는 주어가 예수님이시고 9-11절까지는 주어가 하나님이세요. 예수님이 주어로 자신의 삶을 낮추었을 때 하나님이 주어가 되셔서 그를 높여 주셨다는 거예요. 낮아져야 높아질 수 있는 주님의 역설적 교훈을 말씀하고 있어요. 주님은 우리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세상적인 성공과 부요함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고생과 희생이 기다리고 있지만 낮아지고 섬기는 길로 가는 것이 우리가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가르쳐 주고 있어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알고 있는데도 왜 우리는 이렇게 살지 못할까요? 한 가지는 세상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아요. 세상은 영광을 얻기 위해서는 높아져야 하고 성공해야 해요.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하지요.
또 한 가지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 됨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이렇게 낮은 곳에 처하여 희생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셨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낮아진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에요.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었지만 신분을 감추기 위해 초라한 몰골로 월매에게 갔어요. 그간 사정을 모르는 월매는 거지가 되어 나타난 이도령을 심하게 구박했어요. 심한 모욕과 구박을 받아도 이도령이 웃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분이 진짜 암행어사였기 때문이죠. 진짜 큰 것을 가지고 있으면 고난이나 희생에 대해서 참을 수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낮아지고 고난을 받고 희생하는 일도 감사하며 할 수 있어야 해요. 영광을 얻기 위해서 높아져야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높은 곳은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위협해요. 모든 생명은 낮은 곳에 있어요. 저지대 습지대에 가야 많은 생명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주님은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희생 당하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신 거죠. 십자가의 길로 갈 때만 영광의 문에 이를 수 있어요.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