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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허무는 사랑(눅10:25-37)
인종, 성, 지역, 나이 등과 같은 말에 공통적으로 붙일 수 있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차별’이다. 인종차별, 성차별, 나이차별은 이제 자연스러운 말이 되었다. 우리는 차별에 익숙한 사회를 살고 있다. 차별이 장성하면 혐오를 낳는다. 특히 신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차별은 혐오를 낳게 마련이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과의 대화하던 중 ‘누가 내 이웃이냐’하고 물었다.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직접 대답하지 않고 비유를 통해서 이웃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제사장은 이 사람을 피하여 지나갔다.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갔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면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런데 피하여 지나갔다. 그런데 한 사마리아인이 다가가서 치료하고 이 사람을 주막으로 데려가서 그 날 밤까지 돌봐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떠나면서 더 치료 받을 수 있을 비용까지 넉넉하게 계산해 주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하고 물었다. 뻔한 질문이다. 답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예수님이 ‘누가 내 이웃이냐’는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누가 내 이웃이냐’는 판단을 하는 순간 누가 내 이웃이 아닌지가 결정된다. 그러면 지금 사랑하라는 명령과 연관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제 누군가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론을 만들어 내는 꼴이 된다. 누가 이웃이라고 말하면, 그 순간 누가 이웃이 아닌지가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누가 이웃이냐 아니냐의 판단 기준이 신앙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면, 누군가를 신앙의 이름으로 배제하게 된다. 배제는 선을 긋고 남을 선 밖으로 밀쳐 내는 것이다. 이 배제가 차별을 낳고 차별은 혐오를 낳는다. 예수님은 누가 내 이웃이냐에 대답하지 않으므로 선을 그어놓고 누군가를 밀쳐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이 차별과 배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지금도 그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은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보다 더 큰 악은 없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큰 악을 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예수님이 등장시킨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이 차별하고 배제하며 혐오하던 사람이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이라면 하나님이 죽여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사마리아인을 우상숭배자라고 하여 낙인찍고 처음부터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하였다. 낙인을 찍는 것은 한 사람의 인격을 말살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이런 사마리아인을 의도적으로 등장시켜서 율법교사가 가진 이웃의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리고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느냐? 하고 물으신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약자를 만나면 피하지 않는 것이다. 기준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 사람이 지금 도움이 필요한가? 누가 내 이웃으로 원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때 내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경계를 허무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그 사랑이 모든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이웃이 되기를 바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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