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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왜 좋은 소식인가? (롬1:16-17)
복음이란 좋은 소식이란 뜻인데, 원래 기독교 용어가 아니었다. 1세기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를 제패하여 전쟁이 없는 평화 시대를 열었다. 로마의 다스림으로 세상에 평화가 왔으니 로마의 통치가 오래 지속돼야 한다는 이런 이야기가 좋은 소식으로 로마 제국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그때 바울이 등장하여 로마의 복음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복음을 믿으라고 하였다. 로마의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는 하지만 상대적이다. 나에게 좋은 소식이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좋은 소식이 나중에 나쁜 소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 복음은 언제나 모두에게 좋은 소식이다. 왜 좋은 소식인가?
16절에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다. 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고 하였다. 복음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은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의’라는 말은 ‘바른 관계’, ‘관계의 신실함’을 뜻한다. 그래서 의롭다는 말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바른 관계 속에서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부모로서, 혹은 자녀로서, 혹은 아내와 남편이라는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그 관계의 책임을 신실하고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머물러 있어야 할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떠나서 불의하게 된 것이다. 탕자는 마땅히 신실해야 할 부자 관계를 깨뜨리고 불의하게 되었다. 불의한 관계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탕자처럼 망가지게 되고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 탕자도 부자관계를 깨뜨렸기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신도 신지 않고 달려가서 그를 안아 주었다. 아버지의 변함없는 신실함이 아들을 살리는 복음이 되었다.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저버린 인간인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신실함으로 인간을 받아주셨다. 이렇게 보여주신 관계의 신실함이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이다. 하나님의 의가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 예수님이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면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예수님의 신실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의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탕자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탕자를 안고 ‘내가 너를 용서하마, 너는 내 아들이야’ 라고 하는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죽어야 할 십자가에 아들을 죽이고 우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내미는 그 손을 잡는 것이 믿음이다. 한번 아버지 손을 잡는 것으로 그치면 안되고 계속 바른 관계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래야 아들은 아들다워지고 부모는 부모다워질 수 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우리는 관계를 깨뜨려고 망가지게 한 불의한 자이지만 하나님은 망가진 관계를 다시 세우시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여주셨다. 이것이 복음이고 좋은 소식이다. 나의 의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이 선물 안에 늘 머물러 살면서 자녀다움을 회복하고 사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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