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교회가 쉰 살을 맞이했습니다. 예로부터 50을 ‘지천명’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명을 안다는 뜻입니다. 마흔까지는 주관적인 삶을 살았지만, 쉰이 되면 하늘 뜻을 성찰하고 반성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이치도 이러한데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교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교회도 하나님의 뜻대로 성숙해져 가야 합니다. 50주년을 맞으면서 성숙한 교회로서 우리 교회가 지녀야 할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누군가가 ‘성숙도’를 ‘불확실성을 수용하는 능력’으로 정의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을 흑백 논리로 구분합니다. 옳든지 그르든지, 잘하든지 못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인생의 경륜이 쌓이면 인생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선한 사람에게 악한 면이 있고, 악한 사람에게 선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른 의견에도 틀린 점이 있고, 틀린 의견에도 바른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판단에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 성숙의 증거입니다.
사도 바울은 섣부르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동기를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고전4:5), 둘째는 판단하고 심판하실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롬14:10) 남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이 완전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은 남의 불완전함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완전함도 잘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긴장과 불평 가운데 살아갑니다.
완전해지라는 말이 성경에 있지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5:4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완전하라고 하신 것은 편파적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선한 사람 밭이나 악한 사람 밭이나 동일하게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처럼 선한 사람뿐 아니라 악한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완전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모습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또 주님의 사역도 완전을 추구하며 임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다 싸웠다”(딤후4:7-8)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흠없이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과 이웃에게 관대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숙입니다.
교회란 여러 지체가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각각의 지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지체는 한 몸에 모여서 다른 지체의 불완전함을 도울 수 있을 때 완전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제 쉰 살을 맞은 우리 교회가 좀 더 성숙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함께 모여서 주님의 온전한 몸을 이루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지천명의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